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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의 경건함

배운 사람들은 자신을 믿고 있어. 한 뭉텅이의 책을 독파했다고 그런 모양인데, 나는 그게 우스워. 심성이야 착한 사람들이지. 하지만 자기들이 연구하고 하는 일이 아주 어렵고 심오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야. 써커스단 사람도 그렇고, 우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 사람들은 어떤 일이 굉장히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에 공중그네 곡예사나 나에게 박수를 보내는 거야. 나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연주를 잘하려면 뼛골 빠지는 노력이 필요하고, 공중그네 곡예사는 훌쩍 뛰어서 그네를 잡을 때마다 손목이 망가져. 하지만 정말 어려운 일은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매순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야. 예컨대, 개나 고양이를 쳐다보거나 이해하는 것. 이런 게 어려운 일이야. 정말 어려운 일이야.1훌리오 꼬르따사르, 「추적자」, 『드러누운 밤』, 박병규 옮김, 창비, 2014, 295쪽.

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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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리오 꼬르따사르, 「추적자」, 『드러누운 밤』, 박병규 옮김, 창비, 2014,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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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어떤 기억

봄비가 내리는 날, 개울가를 걷다가 떨어진 하늘타리를 보았다. 괜히 주우려다 발이 진창에 빠졌다. 되돌아간 길은 아니 걷던 길이 되는가. 썼던 글을 지우면, 했던 말을 잊으면, 없던 일이 되는가. 빈자리가, 부재가 존재보다 오래 남는 메시지였던 니콜라이 예조프를 떠올리며 씁쓸히 웃었다. 검열된 기억의 빈자리마다 싸늘한 증오가 고여 있어 슬프다. 이토록 그리운데 그토록 미울 수가 있다니… 그래, 미움은 아니겠지. 젖은 발이야 어찌어찌 되겠지. 첨벅첨벅 물을 튀기며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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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Review

폭풍의 언덕

에메랄드 페넬의 <폭풍의 언덕>. 키가 2미터에 달하는 근육질의 백인, 프랑켄슈타인의 아름다운 괴물, 제이콥 엘로디가 히스클리프이다. 캐서린은 역시 호주 출신의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마고 로비, 에드거 린튼은 인도계 배우인 샤자드 라티프, 넬리는 홍차우가 담당했다. 이런 폭풍의 언덕이라니, 캐스팅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영화가 시작하면 절정을 향해 치닫는 듯한 남성의 신음이 들린다. 카메라는 교수대에 매달려 죽어가는 남자와 그를 지켜보고 있는 어린 캐서린과 넬리, 지저분한 군중을 교차해서 비춘다. 발기되어 있던 남자는 죽으며 사정을 한다. 군중은 환호한다. 이 불쾌하고 거북스러운 시퀀스는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펜넬 감독은 처음부터 노골적이다. 브론테가 절제된 언어 뒤에 숨겼던 외설적 진실, 더럽고 파괴적이고 유독한 사랑의 본질을 얘기하고 싶어 한다. 사랑은 아름다운 안식이 아니라, 나를 파괴하는 낯선 타자를 내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지독한 트라우마이며, 서로를 파멸시키면서도 멈출 수 없는 죽음 충동이다.

(캐서린이 넬리에게): 만약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여전히 존재할 거야. 하지만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사라진다면 우주는 아주 낯선 곳이 될 거야.

진정한 사랑은 나의 온 세상을 파괴하고 들어오는 침입자이며, 그 파괴적인 유독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사랑의 윤리는 곧 혁명의 윤리이며, 지젝은 종종 이를 누가복음 14:26 예수의 메시지에 빗댄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다소 일관적이지 않고, 순전히 매혹 그 자체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특이성도 있지만, 펜넬의 시선은 매우 독창적이며, 그가 구사하는 영화적 문법은 극도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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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ETC

고양이가 없지만

선배와 통화를 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모든 것이 전제 하나를 바꿔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니 인생의 선배인 게지. 나는 아직 멀었다, 멀었어. 그렇게 펑펑 울고 나니 그동안 미칠 것만 같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편해졌다.

귀가하여 방안을 둘러보니 정성 가득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그게 내 생각과는 다른 의미들이었던 거야. 하지만 다른 의미로 그러는 게 가능하다고? 세상 모두가 너 같지 않아. 그럼 모든 게 설명된다. 아니, 하지만 전에 나눴던 이런저런 대화들을 보면 설명이 안 되는데? 지난 대화 따위 복기하지 마. 아무런 의미 없어. 그래 상대방의 마음을 착각하긴 했어도, 나는 나대로 사랑할 수 있는 거지. 거기서 삐끗하면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법.

나는 진심으로 그분의 행복을 빌 수 있다. 고양이가 없지만 다행히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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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정원 테이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마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했다.

며칠 전 135x38mm 방부목을 사와 1200mm 길이로 여섯 개를 재단했다. 목재를 가공할 때 나는 나무 냄새가 너무 좋다. 목수가 직업이었다면 더 행복할까? 모서리를 샌딩한 후 투명 바니시를 칠하고 말렸다. 바니시가 잘 마르면, 다시 바니시를 칠한다. 총 네 번 반복한다.

그렇게 준비한 목재로 오늘은 정원 테이블의 상판을 교체했다. 썩어버린 옛 시간을 뜯어낸다. 새 목재를 올리면서 타이머가 리셋되는 거다. 준비해 둔 목재를 올리면 끝이었는데, 고정할 때 필요한 목재용 나사못이 모자랐다. 급히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서 사 왔다. 감기 때문에 아직도 콧물을 흘리는 상황에서 찬 바람까지 맞으니, 눈물도 흘렀다. 왕복 20km를 달렸다. 돌아와 헬멧을 벗었더니 얼굴에 눈물과 콧물 자국이 뻣뻣하게 느껴진다.

한국인들이 미얀마식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쪼쪼’라고 불리던 인물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국의 추위가 견디기 힘들었지만 시종일관 푸대접을 받던 17세의 소년, 골짜기를 타고 칼바람이 불어대서 얼굴에 눈물 자국이 그대로 얼었던 소년. 심지어 나조차도 그의 이름을 외우지 못한다. 너는 참 실망스러운 놈이로구나. 그동안 참았던 온갖 복잡한 감정이 복받쳐서 마당 한가운데서 오열했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던 고양이, 봄이와 앙금이가 놀랐는지 잔뜩 긴장했다. 십수 년 전, 토미와 어굴이가 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면, 이제는 너희가 그 자리를 채워줄 거니? 곁을 내어주지도 않는 매정한 녀석들이 그럴 리가.

상판을 완성하고 나서 커피를 한잔했다. 테이블 옆에는 장작을 태울 화로가 있고, 산수유나무와 포도나무가 있다. 집안의 모든 사물, 모든 생명에는 추억이, 기억이 깃들어 있다. 저주이자 축복이다. 아침 기온이 영하 4도였지만 어쨌거나 산수유꽃이 노랗게 피었다. 포도나무에는 싹이 돋고 있다. 식물도 이토록 치열하게 제 몫의 삶을 살고있다. 오후의 따뜻한 햇볕을 머금은 시골의 마당은 이제 영상 8도. 오른손을 가만히 펴서 인사하듯 들어봤다. 산수유나무야, 안녕! 나도 배운 건데, 이렇게 손을 인사하듯 펴 들면 습기나 바람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단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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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힘듦은 제 몫”이라는 말, 두고두고 비수처럼 심장을 찌른다. 고통도 나눌 수 있다면… 따뜻한 봄날이 오기를, 부디 모든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다리자,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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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앓는 소리를 낼 때면 고양이들은 내 가슴팍 위로 뛰어올라 까슬한 혀로 얼굴을 훑곤 했다. 네가 아픈 건 알겠다만, 그래도 밥은 차려주고 다시 앓으려무나. 무심한 명령을 나는 기꺼이 알아들었다.

몸이 좋지 않을 때는 꿈의 길목에서 고양이들을 만난다. 꿈속의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면서도 아이들에게 밥과 물을 챙겨준다. 가끔 다른 고양이들, 이를테면, 우리 집 마당 어딘가에서 태어났다가 훌쩍 떠나버린 고양이들, 마당에서 뛰어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싸늘하게 식은 채 발견된 아기 고양이들도 모여 있다. 세상에, 너희들 여기서 살고 있었구나? 정말 다행이다, 너무 다행이야. 내가 밥을 챙겨줄게. 아프지 말고 늘 행복하게 지내렴.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깬다. 익숙한 외로움이 반긴다.

얼마나 화나고 아프고 외로우실까. 제발, 부디, 건강과 평안을 찾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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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요양원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 수화기 너머 요양보호사 선생님은 오늘따라 아버지가 방긋방긋 웃으신다며, 직접 숟가락을 들고 식사를 하시는 모습이 너무 고와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몇 해 전 일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아직 떠듬떠듬 말할 수 있을 때, 할 말이 있다며 전화하셨다. 무슨 일일까 덜컥 걱정하며 찾아갔더니 갑자기 펑펑 울면서 내게 사과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과거 나에게 몇 차례 손찌검했던 일이 떠올랐던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자식을 사랑했겠지만 그 사랑을 건네는 법을 몰라 서툴렀던 세월. 삶이 잔뜩 엉클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고집스럽고 강인했던 아버지가 그렇게 약해져 있는 걸 보니 나도 슬펐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을 잡아드렸다. 저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니까 다 잊으시라고. 좋은 기억만 떠올리시라고. 빈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았다. 잘못한 걸로 따지면 내가 더 많이 했다. 내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을 뻔뻔스럽게 잊었듯이, 아버지도 그렇게 잊을 자격이 있다.

방긋방긋 웃었다는 표현이 고마웠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미흡했던 것은 다정함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저 정당하게 자신과 자식을 사랑했지만 삶이란 늘 뭔가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런 결핍은 부모가 아니라, 친구도, 선생도, 연인도, 신도, 세상 누구도 채울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의 결핍에서 자신의 과오를 찾는 일은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여태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는 아기처럼 방긋방긋 웃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술을 마시면서 살다가 뇌졸중으로 끝내는 삶을 동정할 필요 없다고 여겼지만, 내 삶이라고 뭐가 다르겠냐. 지금껏 아버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무신경하고 냉정한 태도를 보여왔던 게 문득 후회스럽다. 지금 스스로가 죽도록 혐오스럽고, 하늘이 갑자기 무너져 눈앞이 캄캄하고, 무엇이라도 붙들고 미친듯이 매달리고 싶은 복잡한 심경이라서가 아니라, 기저귀를 차고 방긋방긋 웃는 아기 같은 존재를, 눈물을 펑펑 쏟으며 떠듬떠듬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존재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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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og ETC

一寸

슬라보예 지젝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고, 나는 거기서 회한이나 자기혐오에 고립되는 태도를 훌쩍 넘어서는 완전히 새로우면서도 평범한 경지를 느꼈다.

우리 부모님은 엄격하진 않으셨지만, 저를 깔보는 듯한 태도를 보이곤 하셨어요. 전 부모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두 분은 어느 날 밤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다음 날 아침 전화를 통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이미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던 중이었죠. ‘다 처리가 된 건가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라고 말하고는 계속 일을 했습니다. 정말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죠. 그렇다고 제가 그런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건 아닙니다.

결말을 알지만 언제 막이 내릴지 모르는 연극의 구경꾼은 낡은 걱정을 깜깜한 미래의 시공간에 내던지고 한눈을 팔 수밖에 없다. 그저 아침 하늘을 바라보며 비가 오지 않기를, 하염없이 맑기를, 바람이 불지 않기를, 사랑이 그저 달콤하기를, 오늘 하루 안온하기를 바랄 뿐이다.

나중에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말 들을 때가 있었을 게지. 내일과 내일과 내일이 매일처럼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순간까지 답답한 걸음으로 기어오누나. 우리의 수많은 어제들은 바보들을 티끌 같은 죽음 길로 데리고 갔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아. 인생은 그림자놀이, 한동안 무대에서 우쭐대고 안달하다 다시는 소식 없는 불쌍한 광대. 소음과 광란이 가득하고 아무런 뜻 없는 바보 이야기.1<맥베스> 5.5.17-27. 이상섭 역, 문학과 지성사, 2017, 6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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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베스> 5.5.17-27. 이상섭 역, 문학과 지성사, 2017, 6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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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Thoughtcrime

2026년 1월 1일부터 체코에서는 공산주의 운동을 홍보하거나 전파하는 행위가 나치즘과 동일하게 취급되어 최대 5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게 되었다.1Czechia: When Communism Beacame Illegal Again

체코의 법 개정이 특히나 많은 것을 시사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도덕적 대칭성에만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법은 공산주의 정치가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영역, 즉 계급 적대(class antagonism)의 영역으로 “증오(hate)”의 논리를 슬그머니 확장한다. 조항의 문구 자체를 보면, 금지된 운동은 권리를 억압하거나 인종, 민족, 국가, 종교적 증오를 선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계급적 증오(class hatred)”를 옹호하는 운동으로 규정된다. 이 추가된 문구는 기술적인 세부 사항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pivot)이다.2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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