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준 포르노그래픽 스케치들에 대해서는 초창기 메마른 성적 판타지가 소피아 부스와의 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따뜻하고 인간적인 에로티시즘으로 변화한다고 평한다.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던 한 남자가 소피아를 만나면서 타인을 신뢰하고 그와 관계 맺는 법, 감정적 욕망을 친밀감과 통합하는 법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아버지의 죽음이 그에게 미친 영향이 컸던가 보다. <Death on a Pale Horse>에는 어떤 경계를 넘어서는 강렬함이 있다. 내가 매료된 터너의 작품들은 모두 이후의 작품으로 보인다.
경계는 흐려지고 사물의 외형은 녹아내리며 색과 빛이 형태를 잠식한다. 구도는 더 이상 인간의 안전한 시점에 복무하지 않는다. 그림 앞의 인간은 응시의 주체가 아니라 응시에 압도되는 또 하나의 대상이 되는 느낌을 받는다.
흥미로운 베트남 쌀국수의 기원을 찾는 여행 기록. 쌀국수의 기원지로 알려진 곳인 하노이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남딘성 반꾸(Vạn Cú) 마을과 하노이를 오가며 취재한다.
“아니, 그건 조금 더 복잡한 얘기예요.” 응우옌이 말해 내게 의외를 안겼다. 나는 또 한 번의 반전이 이어질까 긴장했다. “퍼의 한 형태는 반꾸에서 시작됐지만, 실제로 형태를 갖춘 건 하노이예요. 반꾸 사람들 덕분이죠.” 퍼는 하노이에서 훨씬 더 맑은 국물과 적은 피시소스로 발전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20세기 초에 많은 반꾸 사람들이 하노이로 이주해 왔고, 부자나 프랑스인들만 먹을 수 있던 소고기 쌀국수를 만들 기회를 보았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오늘날 퍼는 모두의 음식일지 몰라도, 100년 전,” 응우옌은 말했다, “그건 부자들을 위한 요리였어요.”
그 말이 이해됐다. 퍼가 베트남 북부에서 시작됐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정확히 어디서 비롯됐는지에 대해서는 영영 합의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퍼는 프랑스와 중국의 영향이 일부 섞이고, 여기에 베트남인의 기지와 자립심이 더해져 탄생한, 베트남의 복잡한 역사를 반영하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남딘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하노이에서 완성되었고, 이제는—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기에—전 세계가 사랑하는 음식이 되었다.
<문화/과학> 90호에 실린 서동진의 글 <인터내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기억 연습>을 경유해 도달한 영상. 2012년 벨기에의 구 광산도시 헹크에서 열린 <마니페스타 9> 비엔날레에서 공개된 작품. 작은 골동품 뮤직박스가 마이크에서 마이크를 거치면서 증폭되고 전시장 외부의 대형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진다.
엣지는 위험을 즐기는 자, 한탕주의자들이 가는 불분명한 곳이야. 엣지에서는 돈, 명성, 심지어 목숨까지 원칙이나 한탕만큼이나 모호한 것에 걸지. 사이버펑크로서 넌 행동 그 자체가 되길 원해. 반란을 일으키고, 불을 붙이고, 거대한 대의에 뛰어들고, 큰 문제를 위해 싸워. 빠르게 달릴 수 있는데 천천히 갈 이유가 없지. 위험을 정면으로 맞서고 피하지 않아. 너무 안전하게 놀지 마. 엣지에 헌신하는 거야.
영화 <Blade Runner>의 제목은 사실 윌리엄 S. 버로스의 단편 <Blade Runner: A Movie>에서 따온 건데, 그것 역시 또 다른 소설 앨런 E. 노어스의 <The Bladerunner>에서 가져왔다. 수술용 칼 따위의 불법 의료 장비를 운반하는 밀수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말 그대로 “칼을 들고 달리는 사람”이었던 것.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의미와는 상관없이 강렬하고 미래적인 느낌 때문에 이 제목을 차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엉뚱하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칼날, 혹은 경계 위를 달리는 자 등으로 해석되면서 사이버펑크의 고전에 안성맞춤인 의미를 얻게 되었으니까.
지금까지 인류를 실망시킨 적 없는 CD Projekt RED의 <Cyberpunk 2077>을 최근 다시 플레이했는데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후유증을 앓고 있다.
1825년, 테런스 쿠네오가 그린 〈스토크턴-달링턴 철도의 개통식〉 속 기관차가 끌고 있는 차량들은 우리가 아는 객실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스스로 달리는 기계에 열광한 사람들은 의자도 창문도, 지붕도 없는 객차 위를 점령한 채 환호하고 있다. 열차는 위압적이지 않다. 오히려 만만해 보인다. 주변은 경주를 벌이는 사람과 개, 말, 당나귀들로 북적거린다. 우리는 결말을 알고 있다. 혀를 내밀고 달리는 강아지가 귀여움으로는 우승이지만, 속도는 결국 증기기관차가 이긴다.
윌리엄 터너의 1844년 작품 <비, 증기, 그리고 속도 –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1https://en.wikipedia.org/wiki/Rain,_Steam_and_Speed_%E2%80%93_The_Great_Western_Railway. 이 작품은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되어 관람객들을 충격에 빠뜨리는데 새롭게 도래한 기계 시대와 이전의 느린 삶의 속도를 대비한 그 강렬한 표현이 매우 극적이라는 반응을 얻었다. 그림의 대부분은 상호 침범하는 하늘과 땅, 비구름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중심, 까마득한 과거 어딘가에서 관찰자의 시공간으로 뻗어오는 철로 위로 사선의 빗줄기가 내리친다. 모든 사물의 윤곽이 희미하지만, 철로 위를 질주하는 증기기관차의 굴뚝 만큼은 선명하다. 열차를 확대해서 보면 뜻밖의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다.2그림의 실제 크기는 91cm x 121.8cm 이다.
수년 동안 이 그림을 벽에 걸어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면 지붕 없는 객차가 분명히 묘사되어 있다. 사람들은 비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며 기관차가 내뿜는 연기를 피할 길도 없다. 1844년의 철도 여행, 특히 삼등석의 실상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철도의 초창기 시절, 철도 회사는 삼등석 승객들이 여행하도록 장려할 의지가 거의 없었고 —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삼등석 승객들에게 제공된 좌석은 지붕도 없는 화물차였지만, 어디를 가고자 하면 걸어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던 사회 계층에게는 한겨울이라 해도 개방형 삼등석 객차를 타는 것이 그리 큰 고생은 아니었다. 다만, 날씨를 견디는 대신 기관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배기가스를 견뎌야 한다는 점이 달랐다. 이등석 승객을 위한 편의는 ‘일등석’과 ‘삼등석’의 중간쯤이었다. 객차 양옆은 열려 있었지만, 위쪽에는 지붕이 있어 어느 정도 날씨를 피할 수 있었다. 여행하는 습관이 점점 확산되고, 평생 한 번도 여행을 해본 적 없던 사람들이 철도를 타기 시작하자, 더 나은 삼등석 객차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물이 빠져나가도록 구멍을 뚫어 놓은 객차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선로에서 일하는 인부들에게 빈 병을 던지는 난폭한 무리 이야기도 들린다. 열차 속도로 인한 돌풍에 모자를 날려버린 ‘애지중지하던 실크 해트’를 잃는 경우도 많았는데, 물론 철도에는 사등석이 없다는 이유로 항상 삼등석만 탄다는 어떤 성직자의 이야기도 있었다. 개방형 화물차 안에는 몇 개의 좌석이 있긴 했지만, 대개는 승객 수가 좌석보다 훨씬 많았고, 초기의 삼등석 열차는 승객들이 잔뜩 몰려 서로 몸을 부딪치며 서 있는 모습이 오늘날 런던 지하철 러시아워의 풍경을 연상시켰다.4https://victorianweb.org/technology/railways/p1.html
위로부터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
철도는 민간 회사가 독점적으로 운영했고, 요금과 노선, 서비스 수준이 각기 달라 통일성이 없었다. 삼등석 객차는 지붕도 없는 화물차 개조형이었다는 문제 외에도 대부분 하루에 한두 번만, 그것도 불편하고 느린 시간대에만 운행되었다. 다른 도시로부터 자유롭게 노동력을 공급받고자 하는 자본의 요구, 그리고 차티스트 운동 등 정치사회 개혁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저렴하고 인간다운 철도 여행 요구가 커졌고, 1844년 철도 규제법(Railway Regulation Act)이 제정된다. 이에 따라 개방형 객차는 금지되고 지붕과 측면 벽, 그리고 좌석이 필수가 된다.
오노레 도미에가 186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삼등석 객차>. 딱딱한 나무 의자가 놓인 좁고 더럽고 개방적인 객실로, 이등석이나 일등석 표를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묘사되고 있다.
아카마츠 린사쿠가 1901년 그린 메이지 시대의 삼등석. 어둠이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 낡은 목제 객차 안은 묵직한 공기와 함께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창문 밖으로는 잿빛 여명이 스며들어, 나무 프레임과 빛바랜 시트 위로 가느다란 은빛 결을 깔아놓는다. 객석에는 인생의 여러 결이 앉아 있다. 잠과 깨어남, 피로와 기대, 무심함과 기다림이 겹겹이 포개져 있는 작은 세상.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는 ‘모든 객차는 인민의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형식상 등급 차별을 철폐한다. 그렇다고 모든 객실이 똑같을 수는 없었는데, 국토가 방대하기 때문에 침대차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대에는 침대차(스파르니 바곤), 4인실(쿠페), 좌석형(플라츠카르트) 등 편의성에 따른 구분이 정착된다. 오늘날 러시아의 객차 체계도 이를 계승하고 있는데, 여행안내서를 보면 각각을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으로 무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새마을호는 아주 빨리 온다 무궁화호도 빨리 온다 통일호는 늦게 온다 비둘기호는 더 늦게 온다 새마을호 무궁화호는 호화 도시 역만 선다 통일호 비둘기호는 없는 사람만 탄다 새마을호는 작은 도시 역을 비웃으며 통일호를 앞질러 달린다 무궁화호는 시골역을 비웃으며 비둘기호를 앞질러 달린다 통일쯤이야 연착을 하든지 말든지 평화쯤이야 오든지 말든지
누구를 태우고 얼마나 빨리 달리며 어디에 서느냐가 결국 누가 어디서 살고 어떻게 대우받는가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간결한 언어로 드러낸다. 사회적으로 빠른 통로를 확보한 자들이 시간, 노동, 기회가 느리게 흐르는 사람들을 언제나 앞지르고 그들을 비웃는다.
그렇다면 체제를 무엇으로 바꿔야 할까? 그것은 바로 ‘1인 노동자 = 1주식 = 1표’ 원칙에 기반한 새로운 기업 구조다. 이는 공적 기금이나 실체 없는 소유주에 의해 움직이는 법인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젊은 세대에게 진정한 영감을 줄 수 있는 의제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통찰은 빅테크와 거대 금융, 그리고 국가가 협력하여 우리를 몰래 가둔 ‘기술봉건제’ 세계를 이해하려 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이 체제가 감시 자본주의보다 더 악질적인 형태임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마르크스처럼 사고해야 한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자본의 돌연변이—즉 클라우드 자본—으로 봐야 한다. 이 클라우드 자본은 우리 행동 자체를 조정하고 있으며, 경이로운 과학적 돌파, 신경망, 상상을 초월하는 인공지능들이 만들어낸 이 세계에서, 사유화와 사모펀드가 주변의 물리적 자산을 수탈하는 동시에, 클라우드 자본은 우리의 뇌를 수탈하고 있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렌즈를 통해서만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집단적으로 클라우드 자본을 소유해야 한다.1야니스 바루파키스, “2025년에 마르크스가 왜 필요한가?“
2000년 5월의 마지막 주에 방영된 ⟪퓨처라마⟫ 에피소드는 ⟨Anthology of Interest⟩. 프라이는 그가 냉동 캡슐에 빠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했고, 판스워스 박사의 What-If Machine은 1999년의 시공간에 남은 프라이의 현실을 들여다 본다. 그는 여전히 피자 배달부로 살아가며, 로봇과 외계인이 뒤섞여 사는 미래 대신 90년대 말의 지루한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미래의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퓨처라마의 시공간에 균열이 생긴다.
이를 피자가게 단골이었던 스티븐 호킹 박사 — 호킹의 목소리 연기는 실제로 호킹 박사가 했다 — 가 눈치채는데, 그는 사실 우주의 시간-존재 균형을 지키는 위원회의 멤버였다. 그는 프라이 때문에 생긴 균열에 “호킹 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한다.
위원회는 프라이를 납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을 대놓고 너드라고 부른다.
앨 고어. 마찬가지로 앨 고어 본인이 직접 목소리 연기를 했다. 앨 고어는 환경보호자로서 우주의 붕괴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던전 앤 드래곤의 창시자 개리 가이객스가 등장하여 모든 문장을 끝맺기 전에 주사위를 굴린다. 그는 프라이에게 “+1 메이스”를 무기로 건넨다.
IBM이 만들어 체스게임에서 인간을 이긴 체스 특화 인공지능 딥 블루가 인턴이라며 소개된다. 목소리 연기는 트레스 맥닐이 담당했다. 앨 고어는 그(녀)에게 모든 임무가 체스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언제가는 이해하게 될거라고 조언한다.
이 짧은 이야기는 프라이가 냉동 챔버를 파괴하여 미래의 자신을 죽여버리는 패러독스를 만들어냄으로서 현실을 붕괴시키는 결말로 이어진다. 우주는 소멸하고 너드들만 남는다. 그들은 기꺼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영원히 던전 앤 드래곤을 즐기기로 한다. 앨 고어는 열 번째 정도 수준의 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대략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보는 것 같다. 90년대의 너드들이란 다소 소외된 주변인이었고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었다. 컴퓨터와 인공지능, 과학 같은 따분한 공부를 하고, 집구석에서 던전 앤 드래곤을 즐기며, 스타트렉과 같은 서브컬처에 몰입하면서,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노스텔지어와 자학적인 개그로 가득한 상징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세월을 감각하게 된다. 90년대의 그 너드들이 오늘날의 빅테크 산업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그들이 즐기던 코믹스와 애니메이션이 블록버스터로, 가장 잘 팔리는 문화상품으로 끊임없이 재탄생하고 있다. 그들은 핍진한 전문가이자 문화 주도층이 되었다.1오늘날 너드의 이런 ‘성공’은 기술에 대한 무비판적인 숭배, 인터넷-정보에 대한 맹신, 디지털 혁신을 자연스럽고 중립적인 힘으로 환상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다.
옆집 이장네 부부에겐 세 아들이 있다. 큰아들이 중학생인데 아직도 컴퓨터를 잘 못 다루는 것 같다며 나에게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간단하게 답을 줬다. 컴퓨터로 게임을 할 수 있게 허용하라고, 컴퓨터로 마음껏 게임을 할 수 있다면 알아서 준전문가가 될 거라고. 그게 너드들이었다. 아무 쓸모없는 짓에 시간 낭비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1 메이스” 하나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야 인생 아니겠나. 판스워스 박사가 이 에피소드 마지막에 자조적으로 중얼거린다. “사람은 꿈을 꿀 수 있지.”
footnote
1
오늘날 너드의 이런 ‘성공’은 기술에 대한 무비판적인 숭배, 인터넷-정보에 대한 맹신, 디지털 혁신을 자연스럽고 중립적인 힘으로 환상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다.
“I would rather be ashes than dust! I would rather that my spark should burn out in a brilliant blaze than it should be stifled by dry rot. I would rather be a superb meteor, every atom of me in magnificent glow, than a sleepy and permanent planet. The proper function of man is to live, not to exist. I shall not waste my days in trying to prolong them. I shall use my time.”
나는 먼지가 되기보다 재가 되는 것을 택하겠다! 내가 피운 불이 화려한 불꽃으로 타오르다 꺼지는 것이, 썩은 나무가 되어 꺼지는 것보다 낫다. 나는 나태한 행성보다는 찬란한 유성이고 싶다. 인간의 본래 임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을 단순히 연장하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시간을 제대로 사용할 것이다.
— Jack London’s Credo
홍콩의 사민련(社會民主連線, League of Social Democrats, LSD)의 해산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고, 무의미함 앞에서 주저하지 맙시다. 홍콩의 모든 어두운 구석에서, 우리는 확신으로 빛나기를 바랍니다.”1플랫폼.C, “홍콩 사회운동 최전선을 지키던 진보정당의 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