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재감상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아리엘> 한 장면. 주인공의 아버지는 죽기 전에 작은 오르골이 딸린 자동차 키 고리를 물려주는데, 도시에 와서 오갈 곳이 없어진 그가 비로소 오르골을 돌려본다.

1825년, 테런스 쿠네오가 그린 〈스토크턴-달링턴 철도의 개통식〉 속 기관차가 끌고 있는 차량들은 우리가 아는 객실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스스로 달리는 기계에 열광한 사람들은 의자도 창문도, 지붕도 없는 객차 위를 점령한 채 환호하고 있다. 열차는 위압적이지 않다. 오히려 만만해 보인다. 주변은 경주를 벌이는 사람과 개, 말, 당나귀들로 북적거린다. 우리는 결말을 알고 있다. 혀를 내밀고 달리는 강아지가 귀여움으로는 우승이지만, 속도는 결국 증기기관차가 이긴다.

윌리엄 터너의 1844년 작품 <비, 증기, 그리고 속도 –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1https://en.wikipedia.org/wiki/Rain,_Steam_and_Speed_%E2%80%93_The_Great_Western_Railway. 이 작품은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되어 관람객들을 충격에 빠뜨리는데 새롭게 도래한 기계 시대와 이전의 느린 삶의 속도를 대비한 그 강렬한 표현이 매우 극적이라는 반응을 얻었다. 그림의 대부분은 상호 침범하는 하늘과 땅, 비구름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중심, 까마득한 과거 어딘가에서 관찰자의 시공간으로 뻗어오는 철로 위로 사선의 빗줄기가 내리친다. 모든 사물의 윤곽이 희미하지만, 철로 위를 질주하는 증기기관차의 굴뚝 만큼은 선명하다. 열차를 확대해서 보면 뜻밖의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다.2그림의 실제 크기는 91cm x 121.8cm 이다.

수년 동안 이 그림을 벽에 걸어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면 지붕 없는 객차가 분명히 묘사되어 있다. 사람들은 비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며 기관차가 내뿜는 연기를 피할 길도 없다. 1844년의 철도 여행, 특히 삼등석의 실상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O.S. Nock3https://en.wikipedia.org/wiki/O._S._Nock의 책에서 발췌한 글이 당시의 삼등석 객차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철도의 초창기 시절, 철도 회사는 삼등석 승객들이 여행하도록 장려할 의지가 거의 없었고 —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삼등석 승객들에게 제공된 좌석은 지붕도 없는 화물차였지만, 어디를 가고자 하면 걸어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던 사회 계층에게는 한겨울이라 해도 개방형 삼등석 객차를 타는 것이 그리 큰 고생은 아니었다. 다만, 날씨를 견디는 대신 기관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배기가스를 견뎌야 한다는 점이 달랐다. 이등석 승객을 위한 편의는 ‘일등석’과 ‘삼등석’의 중간쯤이었다. 객차 양옆은 열려 있었지만, 위쪽에는 지붕이 있어 어느 정도 날씨를 피할 수 있었다. 여행하는 습관이 점점 확산되고, 평생 한 번도 여행을 해본 적 없던 사람들이 철도를 타기 시작하자, 더 나은 삼등석 객차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물이 빠져나가도록 구멍을 뚫어 놓은 객차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선로에서 일하는 인부들에게 빈 병을 던지는 난폭한 무리 이야기도 들린다. 열차 속도로 인한 돌풍에 모자를 날려버린 ‘애지중지하던 실크 해트’를 잃는 경우도 많았는데, 물론 철도에는 사등석이 없다는 이유로 항상 삼등석만 탄다는 어떤 성직자의 이야기도 있었다. 개방형 화물차 안에는 몇 개의 좌석이 있긴 했지만, 대개는 승객 수가 좌석보다 훨씬 많았고, 초기의 삼등석 열차는 승객들이 잔뜩 몰려 서로 몸을 부딪치며 서 있는 모습이 오늘날 런던 지하철 러시아워의 풍경을 연상시켰다.4https://victorianweb.org/technology/railways/p1.html



위로부터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
철도는 민간 회사가 독점적으로 운영했고, 요금과 노선, 서비스 수준이 각기 달라 통일성이 없었다. 삼등석 객차는 지붕도 없는 화물차 개조형이었다는 문제 외에도 대부분 하루에 한두 번만, 그것도 불편하고 느린 시간대에만 운행되었다. 다른 도시로부터 자유롭게 노동력을 공급받고자 하는 자본의 요구, 그리고 차티스트 운동 등 정치사회 개혁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저렴하고 인간다운 철도 여행 요구가 커졌고, 1844년 철도 규제법(Railway Regulation Act)이 제정된다. 이에 따라 개방형 객차는 금지되고 지붕과 측면 벽, 그리고 좌석이 필수가 된다.

오노레 도미에가 186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삼등석 객차>. 딱딱한 나무 의자가 놓인 좁고 더럽고 개방적인 객실로, 이등석이나 일등석 표를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묘사되고 있다.

아카마츠 린사쿠가 1901년 그린 메이지 시대의 삼등석. 어둠이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 낡은 목제 객차 안은 묵직한 공기와 함께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창문 밖으로는 잿빛 여명이 스며들어, 나무 프레임과 빛바랜 시트 위로 가느다란 은빛 결을 깔아놓는다. 객석에는 인생의 여러 결이 앉아 있다. 잠과 깨어남, 피로와 기대, 무심함과 기다림이 겹겹이 포개져 있는 작은 세상.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는 ‘모든 객차는 인민의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형식상 등급 차별을 철폐한다. 그렇다고 모든 객실이 똑같을 수는 없었는데, 국토가 방대하기 때문에 침대차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대에는 침대차(스파르니 바곤), 4인실(쿠페), 좌석형(플라츠카르트) 등 편의성에 따른 구분이 정착된다. 오늘날 러시아의 객차 체계도 이를 계승하고 있는데, 여행안내서를 보면 각각을 일등석, 이등석, 삼등석으로 무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8, 90년대 우리에게는 비둘기호가 있었다. 백무산은 이런 시를 썼다.
새마을호는 아주 빨리 온다
무궁화호도 빨리 온다
통일호는 늦게 온다
비둘기호는 더 늦게 온다
새마을호 무궁화호는 호화 도시 역만 선다
통일호 비둘기호는 없는 사람만 탄다
새마을호는 작은 도시 역을 비웃으며
통일호를 앞질러 달린다
무궁화호는 시골역을 비웃으며
비둘기호를 앞질러 달린다
통일쯤이야 연착을 하든지 말든지
평화쯤이야 오든지 말든지
누구를 태우고 얼마나 빨리 달리며 어디에 서느냐가 결국 누가 어디서 살고 어떻게 대우받는가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간결한 언어로 드러낸다. 사회적으로 빠른 통로를 확보한 자들이 시간, 노동, 기회가 느리게 흐르는 사람들을 언제나 앞지르고 그들을 비웃는다.
footnote
- 1
- 2그림의 실제 크기는 91cm x 121.8cm 이다.
- 3
- 4
기술자본의 집단소유
그렇다면 체제를 무엇으로 바꿔야 할까? 그것은 바로 ‘1인 노동자 = 1주식 = 1표’ 원칙에 기반한 새로운 기업 구조다. 이는 공적 기금이나 실체 없는 소유주에 의해 움직이는 법인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젊은 세대에게 진정한 영감을 줄 수 있는 의제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통찰은 빅테크와 거대 금융, 그리고 국가가 협력하여 우리를 몰래 가둔 ‘기술봉건제’ 세계를 이해하려 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이 체제가 감시 자본주의보다 더 악질적인 형태임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마르크스처럼 사고해야 한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자본의 돌연변이—즉 클라우드 자본—으로 봐야 한다. 이 클라우드 자본은 우리 행동 자체를 조정하고 있으며, 경이로운 과학적 돌파, 신경망, 상상을 초월하는 인공지능들이 만들어낸 이 세계에서, 사유화와 사모펀드가 주변의 물리적 자산을 수탈하는 동시에, 클라우드 자본은 우리의 뇌를 수탈하고 있다.
우리는 마르크스의 렌즈를 통해서만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집단적으로 클라우드 자본을 소유해야 한다.1야니스 바루파키스, “2025년에 마르크스가 왜 필요한가?“
footnote
- 1야니스 바루파키스, “2025년에 마르크스가 왜 필요한가?“
2000년 5월의 마지막 주에 방영된 ⟪퓨처라마⟫ 에피소드는 ⟨Anthology of Interest⟩. 프라이는 그가 냉동 캡슐에 빠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했고, 판스워스 박사의 What-If Machine은 1999년의 시공간에 남은 프라이의 현실을 들여다 본다. 그는 여전히 피자 배달부로 살아가며, 로봇과 외계인이 뒤섞여 사는 미래 대신 90년대 말의 지루한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미래의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퓨처라마의 시공간에 균열이 생긴다.

이를 피자가게 단골이었던 스티븐 호킹 박사 — 호킹의 목소리 연기는 실제로 호킹 박사가 했다 — 가 눈치채는데, 그는 사실 우주의 시간-존재 균형을 지키는 위원회의 멤버였다. 그는 프라이 때문에 생긴 균열에 “호킹 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한다.

위원회는 프라이를 납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을 대놓고 너드라고 부른다.
앨 고어. 마찬가지로 앨 고어 본인이 직접 목소리 연기를 했다. 앨 고어는 환경보호자로서 우주의 붕괴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니셸 니컬스. 트레키들의 우상, 우후라 역시 본인이 직접 등판한다.

던전 앤 드래곤의 창시자 개리 가이객스가 등장하여 모든 문장을 끝맺기 전에 주사위를 굴린다. 그는 프라이에게 “+1 메이스”를 무기로 건넨다.

IBM이 만들어 체스게임에서 인간을 이긴 체스 특화 인공지능 딥 블루가 인턴이라며 소개된다. 목소리 연기는 트레스 맥닐이 담당했다. 앨 고어는 그(녀)에게 모든 임무가 체스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언제가는 이해하게 될거라고 조언한다.

이 짧은 이야기는 프라이가 냉동 챔버를 파괴하여 미래의 자신을 죽여버리는 패러독스를 만들어냄으로서 현실을 붕괴시키는 결말로 이어진다. 우주는 소멸하고 너드들만 남는다. 그들은 기꺼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영원히 던전 앤 드래곤을 즐기기로 한다. 앨 고어는 열 번째 정도 수준의 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대략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보는 것 같다. 90년대의 너드들이란 다소 소외된 주변인이었고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었다. 컴퓨터와 인공지능, 과학 같은 따분한 공부를 하고, 집구석에서 던전 앤 드래곤을 즐기며, 스타트렉과 같은 서브컬처에 몰입하면서,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노스텔지어와 자학적인 개그로 가득한 상징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세월을 감각하게 된다. 90년대의 그 너드들이 오늘날의 빅테크 산업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그들이 즐기던 코믹스와 애니메이션이 블록버스터로, 가장 잘 팔리는 문화상품으로 끊임없이 재탄생하고 있다. 그들은 핍진한 전문가이자 문화 주도층이 되었다.1오늘날 너드의 이런 ‘성공’은 기술에 대한 무비판적인 숭배, 인터넷-정보에 대한 맹신, 디지털 혁신을 자연스럽고 중립적인 힘으로 환상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다.
옆집 이장네 부부에겐 세 아들이 있다. 큰아들이 중학생인데 아직도 컴퓨터를 잘 못 다루는 것 같다며 나에게 좀 가르쳐 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간단하게 답을 줬다. 컴퓨터로 게임을 할 수 있게 허용하라고, 컴퓨터로 마음껏 게임을 할 수 있다면 알아서 준전문가가 될 거라고. 그게 너드들이었다. 아무 쓸모없는 짓에 시간 낭비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1 메이스” 하나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야 인생 아니겠나. 판스워스 박사가 이 에피소드 마지막에 자조적으로 중얼거린다. “사람은 꿈을 꿀 수 있지.”
footnote
- 1오늘날 너드의 이런 ‘성공’은 기술에 대한 무비판적인 숭배, 인터넷-정보에 대한 맹신, 디지털 혁신을 자연스럽고 중립적인 힘으로 환상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다.
“I would rather be ashes than dust!
I would rather that my spark should burn out in a brilliant blaze than it should be stifled by dry rot.
I would rather be a superb meteor, every atom of me in magnificent glow, than a sleepy and permanent planet.
The proper function of man is to live, not to exist.
I shall not waste my days in trying to prolong them.
I shall use my time.”나는 먼지가 되기보다 재가 되는 것을 택하겠다!
내가 피운 불이 화려한 불꽃으로 타오르다 꺼지는 것이,
썩은 나무가 되어 꺼지는 것보다 낫다.
나는 나태한 행성보다는 찬란한 유성이고 싶다.
인간의 본래 임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을 단순히 연장하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시간을 제대로 사용할 것이다.— Jack London’s Credo
홍콩의 사민련(社會民主連線, League of Social Democrats, LSD)의 해산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고, 무의미함 앞에서 주저하지 맙시다. 홍콩의 모든 어두운 구석에서, 우리는 확신으로 빛나기를 바랍니다.”1플랫폼.C, “홍콩 사회운동 최전선을 지키던 진보정당의 해산“
footnote
- 1플랫폼.C, “홍콩 사회운동 최전선을 지키던 진보정당의 해산“
기표로 현실을 만들지 못하니 현실에 폭력을 가해 기표를 짜내려 한다. 생물학적인 여성만 여성으로 인정한다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여성혐오적이다. 라캉적 의미에서 여성은 지워져서가 아니라, 고정된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억압당하지 않던가. la femme n’existe pas(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1https://www.lacan.com/nonexist.htm 남근이라는 기표로 (힘, 리더십, 성공 따위의 마초적인 상징들로) 대표되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기표화되지 않은 타자로 남는다. 그래서 늘 여자에게는 특정한 기표를 덧씌움으로써 억압이 작동하는 것이다. 권위주의는 부정형의 성적 타자에 대한 불안을 견디지 못한다. 때문에 폭력적으로 이를 봉인하려 한다.
footnote
- 1
결국 우리가 직면한 불편한 진실은, 민주주의가 기대고 있는 경제적‧정치적 제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공정한 권력 집중으로 흐르게 되고, 그 권력이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파시즘을 민주주의 내부에서 생겨날 수 있는 위험으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 외부의 일로만 여긴다면, 트럼프 같은 인물들과 그가 이끄는 과두 정치 세력의 부상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개인의 권리’를 내세우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오히려 권위주의적 논리로 변질될 수 있는지도 끝내 직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1Rafael Holmberg, The Fascist Tendencies of Democracy
footnote
- 1Rafael Holmberg, The Fascist Tendencies of Democracy
최근 역(逆)차별, reverse discrimination에 관한 몇몇 코멘트를 보면서 생각을 정리해 본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역차별 주장은 차별이 본질적으로 권력과 제도, 역사에 뿌리를 둔 구조적 억압이라는 점을 무시한다. 차별을 개인적인 불공정 행위로 환원한다.
평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테면, 기울어진 구조를 보정하는 조치, 다시 말해 평등을 수호하기 위한 조치가 자신에게 주어진 기득권(특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한다. 그들의 평등은 일종의 레토릭으로서 개별 행위의 평면에서 작동하는 형식적인 것이다. 인간 개인에게서 사회적 관계를 사상하고 그들 (그러니까 추상적 인간) 모두에게 동일하게 대하는 것이 그들의 평등이다.
차별의 역을 상정함으로써 윤리적인 회피 효과를 얻는다. “너희가 차별받고 있다고 하지만 너희도 똑같이 우리를 차별하고 있다.” 가해와 피해가 전도되고 권력관계가 지워진다. 이렇게 기존의 차별을 형식적으로 뒤집는 역차별 개념은 구조적 권력 관계를 지우고 기존의 특권을 피해로 위장하고 실질적 평등을 위한 시도를 불공정으로 둔갑시킨다.
그러나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에는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진보적 리버럴리즘의 위선적 태도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최근 영화에 다양한 인종과 성 정체성, 성별이 포함되는 포용성 마케팅은 고무적으로 보이지만, 영화 산업의 소유 구조, 자본 배분, 노동 착취 등 근본적인 불평등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대학이나 공공기관에서 인종, 젠더 관련 표현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규제하지만 그 내부에 존재하는 계급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눈감는다. 겉으로는 포용과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기존 권력 구조를 재생산하거나 은폐한다. 표면적 다양성은 유지하지만 권력 구조는 건드리지 않는다. 표현의 폭력성은 제거하고 싶으나 구조적 폭력은 건드리지 않는다. 인권, 기후, 젠더 등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면서도 정작 노동운동, 반자본 투쟁, 실질적 연대 등 구체적 실천에는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이다. 진보성은 도덕적 쾌락의 형식으로 소비된다.
반차별 인권운동의 문제는 역차별 따위가 아니라 어중간한 타협, 급진성의 부재에 있다.
노무현 추모행사 관련 뉴스들을 흘려보내다가 가슴이 답답하여 배달호 열사 추모시집을 꺼냈다.
설거지하다 무심히 그의 집을 본 순간/ 티브이 속 기자의 두 팔이 30년 보일러공이었다는/ 그의 집 거실을 뚫고 방으로 꺽인 순간 식탁 놓을 자리도 없다/ 불평하던 우리 집 거실이 출렁출렁 넓어지던 순간/ 그가 분신했다는 공장 콘크리트 바닥과 농성 중인 깃발들을 뚫고/ 좁아터진 집 어딘가에 숨어있을 그의 노모 구부러진 생애가 보이는/ 순간 나는 냉동실에 갇혔다// (…) 얼마를 살았어야 우리 내놓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방과 방 사이 소리와 소리 사이 방음벽을 치고/ 숨죽여 나누던 사랑의 시간, 그 짧던 모든 밤들이여/ 우린 몰래 사랑했다 가난하여 보일러실 불꽃처럼/ 안으로 타들어가기만 했으니 화석이 되어버린/ 이 몸뚱이는 뉘 육체를 입고 태어날 것인가 다시
김해자, “사랑하기에 충분한 시간” 中, 배달호 노동열사 추모시집 “호루라기”, 도서출판 갈무리, 2003, pp. 18.
기억해야 한다. 2003년 열사 정국은 노무현 정부의 노동 탄압에 대한 처절한 항거였다. 사람이 먼저라던 대통령에게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불순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린 또,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자본의 욕심을 보았다. 돈에 날이 밝고, 돈에 해가 지는 자본의 세상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노동자의 처절한 현실을, 그리고 우린 또, 보고 들어야만 했다. 가장 공평해야 할 사법부의 편애함을, 국민의 심부름꾼이 되어야 할 정치가의 오만함을, 가진 자의 편에 빌붙어 목숨을 아부하는 언론을 보았다.
객토문학 동인, 같은 책, pp. 5.